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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7-06-12 08:02
금년 9월이면/최정순
 글쓴이 : 두루미
조회 : 1,881  

금년 9월이면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기초반 최정순






응접실 바닥에 놓인 분홍색 전단지와 눈을 맞춘 게 인연이 되어 수필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에서 배포한 광고전단지였다. 마치 대형마트에 진열된 과자봉지만큼이나 과목도 많았다. 먹고 싶은 과자를 고르는 기분으로 과목을 더듬었다. 스포츠댄스를 해보고 싶었지만, 수요일 수필창박반으로 정했다.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고 했던가. 벌써 9개월이 지났고, 2주 뒤면 종강이며, 여름방학에 접어든다. 작년 9월 해바라기 씨가 영글어 갈 무렵 입학을 했으니, 금년 9월이면 만 1년이 된다.




첫 강의가 시작되는 날, 맞선보는 기분으로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에 갔었다. 마주친 ‘103호 강의실’, 그리고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었다. 분위기는 품위 있고 초연했다. 문우들의 인상 또한 내 마음을 붙잡았다. 나를 소개할 차례가 왔다. 별일이었다. 손자를 둔 나이에 가슴은 왜 그리도 콩닥콩닥 뛰는지. 혀가 잘 풀리지 않았다. 이름자나 제대로 댔는지, 손바닥은 땀으로 촉촉이 젖었다. 간신히 자리에 앉았는데, 날더러 글을 쓸 수 있는 끼가 보인다는 교수님의 목소라가 귓가에 스쳤다. 그 말 한마디에 홀딱 반했다고나 할까. 불나비처럼 겁 없이 수필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냥 수요일이 기다려지고 날로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잊혀 지지 않는 몇 가지 일이 떠오른다. 40일째 되던 날, ‘잡곡밥’이란 글을 올렸을 때는 교수님이 메일로 ‘글 잘 썼어요.’ 란 다섯 글자를 보내주신 게 나에게 ‘도전’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게 되었다. 메일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꾀병이 날 때면 이 메일을 꺼내서 보기도 한다.


‘103호 강의실’은 수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젊음을 만나고, 잊혀진 추억도 찾고, 우정을 싹틔우고, 염치도 키우고, 때로는 도전해보고 싶은 충동이며 선의의 경쟁심까지도 함께하는 곳이다.


수필은 나에게 제2의 사춘기를 가져다주었다. 마치 시간이 뒤로 흐르듯이 나를 더욱 젊은 모습으로 만들어주었다. 내 자신의 초상화를 진실하게 그려보리라 다짐했다.


갓난아기가 생후 3개월 무렵이면 눈을 맞추고 고개를 가누듯 100일쯤 되는 날, ‘아랫목’이란 글을 올렸을 때의 일이다. 교재에 실렸고, 등단도 이 글로 하면 되겠다는 과분한 말씀을 교수님으로부터 들었을 땐 내색은 안했지만, 내가 그 무엇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맛보았다.


생후 6개월이 되면 젖니가 나기 시작하는데, 170일이 되는 날 ‘팝콘과 영화’란 글이 어느 광고용 ‘소식지’에 실렸다. 문화상품권도 받았다. 학창시절에 ‘상’을 받아보고 몇 십 년만의 일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글을 교수님께 올리고 ‘마로니에 샘가’드나들기를 마치 ‘생쥐가 팥 바구니 들랑거리듯’ 그저 왔다 갔다 하기를 몇 번씩, 겨우 교정된 글이 게시판에 뜨면 가슴은 두방망이질, 정신없이 읽어 내린다.




사막을 가르는 낙타는 물 냄새를 맡으며 오아시스를 찾는단다. 지금껏 23편의 글을 써온 나는 수필의 냄새를 어느 만큼이나 잘 맡아왔는지. 낙타와 푸른 오아시스를 생각해 본다. 마치 산모가 육천 마디의 뼈마디가 늘어나는 엄청난 산고를 치른 다음에야 옥동자를 분만하듯이, 사막의 열풍과 싸워가며 오아시스를 찾는 낙타도, 자기 몸에 지닌 낙타봉속의 물이 다 보타버리기까지의 산고를 치른 다음에야 오아시스를 찾았을 테니, 그에 따른 노력이나 대가도 크게 치르지 않은 내가 수필의 냄새를 운운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인가.


갓난아기도 젖니가 난 뒤로부터 만 6세가 되어서야 영구치가 나기 시작한다던데, 겨우 젖니 몇 개로 수필의 맛을 짭짭거리며 논하려고 하다니 가소롭기 그지없다. 세월의 연륜이 쌓이면 서서히 멋과 맛의 향이 조금씩 묻어나거늘, 하물며 수필은 더 많이 읽어보고, 더 많이 써보고, 더 많이 생각해야하는 기초적인 바탕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세련된 글을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수필을 만난 것은 늘그막에 큰 횡재다. 나다운 수필을 씀으로써 내 특유의 향이 새록새록 피어나서 이웃이 향기롭고, 내가 즐거우면 이것이 바로 수필이 주는 횡재가 아니겠는가. 내 몸에 잘 맞는 수필이란 옷을 지어입고 오래오래 행복해지고 싶다.



(2007.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