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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10-18 10:37
전주시립교향악단 "러시아 음악여행"
 글쓴이 : 조재한
조회 : 2,030  


휘 _ 강 석 희 Seok-Hee Kang, Conductor
지휘자 강석희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하였다. 재학 시 동아음악콩쿨, 중앙음악콩쿨에 입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창악회, 아시아 작곡가 연맹, 미래악회 등에서 여러 창작곡들을 지휘하였고,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지휘연구원에 발탁되면서 본격적인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91년 오스트리아 그라쯔 국립음악원 지휘과에서 수학하였고, 1993년 오스트리아 짤쯔부르크 국립음악원 모짜르테움에서 관현악지휘 및 합창지휘를 전공하여 두 과정 모두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여 디플롬 및 Magister를 취득하였다. 유학 시 Budapest Symphony Orchestra와 Nuernberger Symphonker를 지휘하였고, 귀국 후 KBS 교향악단, 수원시립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 부천시립교향악단,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국내 유수 교향악단을 지휘하며 활발히 연주활동을 하는 지휘자로 주목받고 있다. 오페라와 현대음악까지 폭넓은 음악을 소화해내는 그는 수원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를 역임하였고 현재 전주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단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피 아 노 _ 도리안 렐작 Dorian Leljak, Pianist
Dorian Leljak(도리안 렐작)은 세르비아의 Novi Sad 뮤직 아카데미, 벨그 라드 뮤직 아카데미의 피아노 교수이며 또한 런던 왕립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예일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였 다. 그는 Arbo Valdma(아르보 발마)의 지도로 Novi Sad뮤직 아카데미에 서 학사와 석사를 받았고 예일대학에서 Boris Berman(보리스 베르만)을 사사하면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국제 Isidor Piano 콩쿨의 예술감독, 국제 피아노 학회 대표이자 유럽 피아노 교사 협회 등 여러 학회의 대표이기도 하다. 도리안 렐작은 벨그라드에서 열린 라흐마니노프 국제 콩쿨, Novi Sad 피아노 콩쿨에서 우승했으며, Novi Sad 대학의 Merit Award, 예일대학의 Mary Clapp Howell, Irving Gilmore 와 Parisot Prizes를 수상하였다. 그는 Windstrings 오케스트라, Wyoming 심포니 오케스트라, 예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벨그라드 필하모닉스, 벨그라드 라디오-텔레비전 오케스트라, Voyvodina 필하모닉스, 예일 레파토리 오케스트라 등 수많은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하였으며 오케스트라 뿐만 아니라 리사이틀 등 세계를 무대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실내악에 관심이 많아 유명한 실내악 주자들과도 호흡을 맞추고 있는데 첼리스트 Istvan Varga, 피아니스트Ninoslav Zivkovic가 그들이다. 2002년 그는 미국의 카네기홀, 보스톤 필하모니아 홀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렐작 박사는 클리브랜드 국제 피아노 콩쿨, 로마 국제 피아노 콩쿨, 벨기에의 Namur/Waterlo국제 피아노 콩쿨, 세르비아의 Isidor Bajic 기념 피아노 콩쿨 , 폴란드의 쇼팽 Mazovia 피아노 콩쿨, 이원아트센터 콩쿨 등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PretoriaUniversity, South-African음악 교사 협회, Namur-Jambes 콘서바토리, Missouri-Columbia University, Chetham’s 국제 페스티벌과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피아니스트를 위한 썸머 스쿨, Syracuse University-Setnor 음악학교, Hartford University, Xavier University, 워털루 뮤직 아카데미, 아톤 브루크너 대학, Dollarhide’s Music Center, Schloss Weinberg, Rider 대학교의 웨스터 민스터 합창대학, ASIA국제 피아노 아카데미, 이원아트센터 등 많은 곳에서 마스터 클래스와 강의를 하였다.


program

S. Rakhmaninov /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No. 2 in c minor, Op. 18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2번 다단조 작품. 18
Ⅰ. Moderato
Ⅱ. Adagio sostenuto
Ⅲ. Allegro scherzando


D. Shostakovich / Symphony No. 5 in d minor, Op. 47
쇼스타코비치 / 교향곡 5번 라단조 작품. 47
Ⅰ. Moderato-Allegro non troppo
Ⅱ. Allegretto scherzo
Ⅲ. Largo
Ⅳ. Allegro non troppo



Program note

S
. Rakhmaninov /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No. 2 in c minor, Op. 18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2번 다단조 작품. 18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중 걸작으로, 널리 연주되는 이 작품은 1899년부터 1901년에 걸쳐 작곡된 명작이다. 그는 4곡의 피아노 협주곡 을 썼는데, 2번과 3번이 주로 연주되고 있다. 그는 26세 때부터 얼마동안 신경 쇠약에 걸려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고통스런 생활을 했는데 친구의 권고에 따라 다알 박사의 이른바 암시 요법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박사는 매일 그를 자기의 진료소에서 어떤 암시를 주는 것이었다. "당신은 이제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 그것은 대단히 훌륭한 것이 될 것이다" 라는 암시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펜을 들어 제2번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작품을 다알 박사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바쳤다. 이 아름다운 피아노 협주곡은 1901년 10월27일 모스크바에서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피아노 독주로 초연하였는데, 1904년에 이 작품은 글린카 상을 받게 되어 500루블의 상금도 타게 된다. 이 작품은 시적인 정서가 풍부한 협주곡이어서 일반인들도 쉽게 친숙해 질수 있다. 이때부터 시작해서 1917년 혁명을 피해 파리로 망명하기 까지가 그의 작품 활동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간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협주곡 4번, 심포닉댄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등을 작곡하게 된다. 파리에 망명한 1년 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주로 연주 활동을 하다가 1926년부터 다시 작곡을 시작해 피아노 협주곡 제4번, 관현악곡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광시곡, 교향곡 제3번 등을 작곡한다. 만년에 들어 스탈린이 1급 예술가로 대우하는 조건으로 그의 귀국을 권유했으나 라흐마니노프는 고국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고 결국 1943년 미국 캘리포니아 LA 비버리힐즈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연주시간 : 약 26분)


D. Shostakovich / Symphony No. 5 in d minor, Op. 47
쇼스타코비치 / 교향곡 5번 라단조 작품. 47
1930년대의 소련은 스탈린 1인 숭배 체제 하에서 3천만 명이 숙청당하는 공포정치의 시대였다. 어떤 음악을 써야 할지 작곡가보다 당이 더 잘 알던 시대였다. 문화예술은 암흑 속에서 낙관주의를 설파해야 했다. 당의 지침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가에게는 어김없이 ‘형식주의’ ‘타락한 자본주의’ 등의 딱지와 함께 생명의 위협이 가해졌다. 이념과 체제의 잣대로 음악을 재단하던 시대였다. 촉망받는 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1936년 1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음악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음표 더미들”이라는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비판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쇼스타코비치는 그 해에 완성한 교향곡 4번 C단조의 초연을 포기해야만 했다. 짙은 고독과 염세적인 분위기에 싸인 이 곡은 ‘타락한 부르주아 음악’으로 평가될 게 예상됐고, 그것은 곧 작곡가의 신변을 위협할 게 분명했다. 1937년 11월에 발표한 교향곡 5번은 스탈린의 압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이었다. 1악장과 3악장의 비극적인 분위기를 일소하는 4악장의 당당한 화음과 강력한 타악기의 향연은 아무리 혹독한 억압에도 꺼지지 않는 민중의 승리를 표현했다고 해도 좋고, 운명을 대하는 개인의 낭만적인 의지를 그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스탈린 체제의 전진과 승리를 찬양하는 것은 작곡가의 의도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관변 비평가들은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었다" 등의 찬사와 함께 쇼스타코비치를 복권시켜 주었다. 이 곡은 초연 당시 1시간이 넘도록 박수를 받았다. 연주시간 45분보다 더 긴 시간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회상록 <증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곡의 피날레에서 나는 생기에 찬 낙관적인 비전을 보여주고자 했다. 앞의 세 악장에서 드러난 비극적인 느낌들에 대한 해결책을 추구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모호한 표현으로 체제와 그럭저럭 타협하며 살아간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훗날 제자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일세. 어떠한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연주시간 : 약 45분)